yuna's travelog


언젠가, 잘 생각도 안나도록 오래된 그때.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까?' 하고 신났던 날들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새롭고 재미있고 행복했었던 시절.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아침이 '똑같은 하루의 시작'이 되어버렸고, 심지어는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도 한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런 행복한 아침 기대를, 여행을 떠나 다시 맛본다. 하루하루 예측할 수 없는 날들의 연속. 나쁜 일도 있고 또 그만큼 좋은 일도 있고, 아름다운 것들을 구경한 날엔 물건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돈을 조금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만큼 운좋게 싼 방을 구하기도 하고, 기차를 놓쳤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일 수 있지만,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 알기 때문에 자그마한 행운에도 고마워할 수 있다. 듣고 보고 겪는 모든 것들은 일상을 50배 정도 압축해 놓은, 아주 강도 높은 행복의 경험이 된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한다.

쾌락은 우리를 스스로에게서 멀리 떼어놓는다. 그런데 여행은 우리를 제자리로 데리고 가는 하나의 고행이다.
- 알베르 까뮈. 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 중에서 발췌

항상 그런 마음으로 욕심없이, 가볍게, 고마워할 줄 알며 살고 싶지만 쉽지 않다.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린다. 먹고 사느라, 매일 보는 이들과 부대끼느라, 남들과 나를 비교하느라 잊어버린다. 그리고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남들처럼 살기' 위한, 혹은 '남들 위에 서기 위한' 댓가로 지불한다.


밤 기차 또 놓치다

한국에서 송금한 돈을 찾기 위해 다시 H씨 댁에 들렀다. 주말인데 쉬지도 못하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마웠다. 친구와 H씨가 돈을 찾으러 간 동안 K씨와 이런저런 지난 얘기들을 하며 감자와 당근 껍질을 벗겨 카레를 만들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많이 추운 날. 필요한 물건을 사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신발과 양말은 다 젖고 춥고 많이 힘들었다. 오늘은 밤 기차를 타고 드레스덴으로 가서 내일 오후엔 다시 함부르크로 가야한다. K씨 집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자니 꼼짝도 하기 싫어졌지만, 저녁먹은 후 K씨가 만들어준 에스프레소 한잔으로 기운을 내어 밤 열한시가 넘은 시간에 짐을 싸들고 중앙역으로 향했다...



추위와 피곤함을 한방에 날려준 에스프레소.
이때 비로소 에스프레소 맛을 알았다고나 할까.


마인츠 중앙역에서 프랑크푸르트로, 다시 열차를 두번 갈아타고 드레스덴으로 갔어야 하는데 마인츠에서 첫번째 IC(InterCity)를 타지 못했다. 첫번째 기차를 놓쳤으니 세번째 기차도 탈 수가 없는 시간이었다.

기차를 놓치게 된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타려던 칸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 그 옆칸으로 뛰어갔는데, 막 기차에 오르려는 참에 승무원이 안된다고 하면서 문을 닫고는 그냥 가버렸다. 황당했다. 마인츠 역의 DB 서비스(Die Bahn Service. 철도 안내 센터랄까, 뭐 그런 곳. 독일의 모든 역마다 있다)에 있던 할아버지한테 항의했다. 이 할아버지, 그 기차에 전화를 걸어 승무원과 통화하더니 내가 늦게 가서 그런 거라고 도와줄 수가 없단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드레스덴으로 가는 밤기차는 City Nightline이라는 특별 열차로,
유레일 패스가 있어도 예약을 해야만 한다.
특별 열차라서 쿠셋이 아닌 보통 좌석인데도
보통 열차에 비해 예약비가 세배로 비싸다.


안되겠다 싶어 뒤이어 오는 S8을 타고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 갔다. 이미 드레스덴으로 가는 차는 프랑크푸르트 남부역에서 떠났을 시간. 큰 역에서 예약비라도 환불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DB Service에는 세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나이 많은 아줌마 직원에게 얘기했다.

나 : 어쩌고 저쩌고... 그랬어요!
아줌마 : 니가 늦게 가서 못 탄 거 아니냐?
나 : 그 역에 20분 전에 도착해서 기다렸어요. 승차를 하려는데 안된다면서 우릴 태워주지 않고 문을 닫고 가버렸다니까요. 이해가 안가네요!
아줌마 : (한참동안 부시럭 부시럭거리다가 프린트한 종이 두장을 찾아냄) 2시 00분에 드레스덴으로 가는 차를 탈래? 아니면 가까운 호텔 티켓을 줄테니 거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갈래?
나 : (다행이다 싶었지만 여전히 심각하고 화난 표정을 유지하며) 음... 그러면 할 수 없죠... 호텔 티켓을 주세요!

그렇게 표는 아침 걸로 바꾸었고, 중앙역에서 걸어서 5분쯤 거리에 있는 뮌헤너호프 호텔(Munchenerhof Hotel)로 왔다. 이름은 호텔이지만 그냥 가스트하우스 정도 수준의 숙소로, 그리 나쁘진 않다. 사실 내일 저녁까지 너무 빡빡한 일정이었기 때문에 망설이던 참이었는데 차라리 잘됐다. 드레스덴을 포기하고 여기서 푹 자고 내일 함부르크로 가자(아침도 준다니 그것도 챙겨먹어 주겠어).


DB Service에서 내준 숙소는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5분 거리로,
아래층엔 '아리랑'이라는 한국 식당이 있다.

지금까지 갔던 도시들 대부분 7시만 되면 모든 상점이 닫히고 거리에 아무도 없어지는데,
이곳 프랑크푸르트 역 주변은 마치 서울같다.
한시가 넘은 시간인데 아직도 문을 연 식당, 카페들이 즐비하다.


여행 떠나와서 가장 황당했던 일들 Best (두 건의 소매치기를 제외하고)

여행을 하다 보니 곳곳에서 황당하고 희한한 일들을 당하게 된다. 마치 여행이 심심할까봐 누군가 일부러 준비한 듯이. 그중 몇개.

비엔나의 버터밀크와 누룩

그나라의 언어를 모를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수퍼마켓에서다. 대충 비슷하게 생겨먹은 것을 사면 되지만, 내용물이 보이지 않을 때는 난감하다. 더구나 나처럼 식료품의 성분과 원산지를 따지는 사람에게는, 제품의 표면에 써있는 암호같은 문자들은 고문에 가깝다.

비엔나에서 산 이 버터밀크는 기대했던 것처럼 고소한 것이 아니라 쉬어터지기 직전처럼 시고 걸쭉했고, 버터인 줄 알고 산 저 네모난 것은 빵 만드는 누룩이었다. 난 저걸 한입 베어물기까지 했는데, 맛은 한마디로 이다(누룩=곰팡이?).

3초 안에 내리고 타야 하는 뮌헨 지하철 : 사람도 별로 없었던 지하철. 지하철 문이 열리고 타려고 하는데 어떤 여자가 유모차를 끌고 내리려고 한다. 그래서 잠깐 기다리고 있었더니 대략 3초도 안돼 문이 닫히고(유모차도 못내리고) 지하철 출발.

초고속 에스컬레이터와 무지하게 무거운 문들 : 부다페스트와 비인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는 정말 타기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다. 게다가 모든 동유럽 국가들과 독일의 공공기관, 식당, 호텔 등등의 문들은 정말로 크고 무거웠다. 나혼자 열기 힘들 정도(연약한 척 하는 거 아니다). 여기 노인들은 반사신경도 뛰어나고 힘도 좋은가보다. 초딩들은 절대 어디가서 혼자 문열고 들락날락하지 못할 것이다(바로 그걸 노린 것?).

냉장고 없는 호텔 : 프라하의 Ibis Kaln 호텔, 그리고 뮌헨의 Germania 호텔

개 패스 : 비엔나에서는 개를 데리고 지하철을 탈 때 개 값(?)도 치러야 한다. 그래서 '개 패스(dog pass)'까지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파란 불이 켜지지 않는 신호등 : 부다페스트였던가. 그리 한적한 길도 아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파란 불이 켜지지 않았다. 한참 있는데 어떤 청년이 오더니 신호등에 있는 버튼을 눌렀고 1분쯤 후에 파란불이 켜졌다. 걔 안왔으면 어떡할 뻔했냐고...

정수리 밖에 보이지 않는 거울 : 마인츠에서 묵었던 가스트하우스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으나 화장실 세면대 앞의 거울만은...! 도대체 독일 사람들의 평균 신장은 180센티미터라도 된다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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