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a's travelog


길 위의 사람들 - 호주에서 온 여자아이


아침,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지나가던 동네 아이들에게 길을 묻고 있는데 커다랗고 비쩍 마른 여자아이가 엄청나게 길고 큰 배낭을 메고 다가온다. 첫눈에 보기엔 동양인 같은데, 그러기엔 좀 독특하게 생긴 이목구비.

여자아이) 왜? 어디로 갈라구?
yuna) 동역. 여기 어디서 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는데 여기가 맞나 싶어서.
여자아이) 이쪽으로 쭉 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와. 나 지금 에르제베트 다리로 가는 중인데, 나랑 같은 버스를 타면 돼.
yuna) 응. 고마워... 넌 어디서 왔어?
여자아이) 호주. 너는?
yuna) 난 한국. 남한. 혼자 여행해?
여자아이) 응. 친구랑 다니다가 싸우고 헤어진 후 저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어.
...어쩌고 저쩌고...
그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서서 뭔가 생각하더니 다시 뒤돌아 뛰어가서 울타리에 핀 작은 국화꽃을 꺾어가지고 온다.
여자아이) 내 친구는 내가 이러는 걸 정말 싫어했어...
(응.. 나라도 싫어했을 거야... -_-)

짧고 검은 곱슬머리에 두건과 큰 선글래스를 낀 그녀는 예쁘진 않았지만 씩씩한 걸음걸이와 미소, 그리고 독특한 발음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휘발성고양이님을 많이 닮았다 ^__^). 우린 같은 버스를 타야하는 건데 내게 정액 승차권이 없었기 때문에 아쉽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 왼쪽 오른쪽 화살표를 누르면 다른 사진도 볼 수 있음.


서울에선 단 10분도 걷기 싫어서 택시를 타고 다니던 내가 여기서 택시는 절대 안타고(부다페스트 택시의 바가지 요금은 유명함) 전철비 800원도 아까워서 1일권과 1회권 중 어떤게 싸게 먹힐지 계산 또 계산을 한 후, 그때그때 1회권을 끊어서 다녔다.
그런데, 호주에서 온 그애가 간 후 표를 사려고 1회권 발매기에 동전을 넣었는데, 이것들이 피같은 100포린트 짜리와 50포린트 짜리 동전 두개를 먹고 꿈쩍도 안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주변엔 아무리 찾아봐도 다른 발매기가 없다. 검표에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데 그냥 탈까...하다가 소심한 나는... 그냥 걸었다.


며칠 내내 정말 고전적인(?) 방법의 여행을 했다. 나침반과 지도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지도 보여주면서 물어보고, 튼튼한 두 다리로 여기저기를 걸어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부다페스트의 이런저런 뒷골목들을 많이 돌아다녔다. 사실 처음 인상과는 달리, 관광 안내 책자에 나오지 않은 쪽의 부다페스트는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그림에나 나올 것 같은 예쁜 집과 거리들도 있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네모돌이 집과 아파트, 그리고 구질구질한 거리와 소음, 먼지, 매연이 가득한 거리 또한 부다페스트의 또다른 엄연한 한 얼굴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또 아침부터 무거운 배낭을 지고 20분쯤 걸어 동역에 도착.
첫날과 둘째날 그렇게도 쑤시던 다리가 점점 여행에 적응해가는지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짧은 내 다리가 이렇게 장하게 느껴지긴 처음이다 :-)



유레일 패스 개시


우중충하고 사람도 별로 없는 동역(Keleti Pu)의 매표소.
유레일패스에 개시 날짜와 도장을 받고는 철도 안내센터(Info.)에 가서 몇번 플랫폼에서 타야하는지 물었다. 이 여자, 이상한 말로 한참 얘기한다.

yuna : "English, please" (영어로 말해주세욤~)
안내원 여자 : "I told in english!" (눈을 치켜뜸. 이 말만 들렸다.)
"어쩌고저쩌고...blackboard...저쩌고 어쩌고..." (계속 말은 하는데 영어는 아닌 그 무슨 이상한 언어...)
눈치빠른 내친구 : "블랙보드? 블랙보드래. 어디 까만 판에 써있다는 겐가?"

그녀가 가리키는 쪽 승강장으로 가니 오오, 정말 까만 판에 써있쟈나(사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원래 열차 시간표는 승강장 앞 까만 판에 써있는 것을... -_-)
이러하여 비엔나 경유 뮌헨행 열차에 승차했다. 비수기라 사람이 별로 없다.


비엔나로 가는 열차 안. 같은 컴파트먼트에 있던 현지인인 듯한 한 남자는 한시간쯤 후에 헝가리 외곽의 한 도시에 내렸고, 그후 편하게 드러누워 차창 밖 하늘을 보면서 비엔나까지 왔다.
창밖엔 구름과 나뭇가지가 지나가고, 노곤하게 햇살이 비쳐들고, 낯선 곳에서 바짝 긴장했던 그 며칠간 생각지 못하고 있던 것을 문득 깨달았다.
서울의 사무실 안에 하루종일 갇혀있던 나 자신, 그리고 내가 당면했던 그 모든 일들과 문제들에서 멀리멀리 떠나왔다는 것을.
작은 미소와 함께 졸음이 밀려왔다.
* 그 순간이, 그 노곤한 안도감이 지금, 너무너무 그립다.


2004년 4월 20일, 비엔나에 도착하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시간은 온통 두리번거림과 질문의 연속이었다. 영어 표지판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영어는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식료품을 파는 수퍼마켓도, 약국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도대체 사람사는 곳인지 공공건물인지 가게인지 알 수 없는(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건물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거리.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헝가리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어딜가나 다들 영어를 잘 알아듣고, 발음이 좀 딱딱하긴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만한 영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부다페스트 보다 약간 더 친절하다. 여기저기 망가진 것 투성에 생필품을 파는 곳도 별로 없고 말도 하나도 안 통하고 바가지 요금과 소매치기가 많다는 부다페스트에서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비인에 와서 조금 풀렸다. 첫눈에 보기에 모든 것이 깨끗하고, 제대로 되어있고, 그래도 한국과 비슷해서 편하다(그러나 여전히 수퍼마켓은 8시면 닫고, 24시간 편의점은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싼 숙소만 다니기로 했지만 적어도 한 나라에서 하루는 호텔을 예약했다. 나라마다 비슷한 가격대의 호텔들 수준이 어떤가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중요한 건 샴푸를 리필할 수 있다는 것. 샴푸를 60ml짜리 병에 담아왔는데 이걸로는 한달은 택도 없다. 그래서 열흘에 한번쯤 호텔에 있는 샴푸를 이 병에 다시 리필하곤 했다. 원래는 쓰던 샴푸만 쓰는 나지만, 궁한데 어쩌랴...
* 여행 내내 각종 샴푸와 바디클렌저가 섞인 액체, 비누 등등으로 머리를 감고 다녔더니 이젠 뭘로 머릴 감아도 아무렇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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